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구 황후 (문단 편집) == 진구 황후의 정체에 대한 학설들 == 진구 황후의 기록이 이렇게 앞뒤가 전혀 안 맞다 보니, 이미 [[에도시대]] 때부터 일본 내에서도 여러가지 설이 혼재되어 서로 갑론을박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일본 사학계는 제국주의 시절 이 반론들을 다 묵살하고 일본서기의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 밀어붙였다가 결국 현재는 폐기된 상태. * 1. 실존인물설 말 그대로 실존인물이라는 설. 당연하지만 [[일본 제국]] 시대가 끝나고, [[1945년]] 고대 일본사서 비판이 해금된 이후로는 일본서기의 모든 기록이 진실이라는 일본제국의 정설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현재는 진구 황후 전설이 내려오는 일부 신사나 이들 신사의 마쓰리에서나 볼 수 있다. 즉 역사가 아닌 설화로 취급받는다. 실존인물로 인정한다 치더라도 모티브인 주아이 덴노의 황후 그 이상을 넘어서진 않으며[* 사실 요즘 학계는 주아이 덴노도 가상인물로 여긴다(...) ], 삼한 정벌은 부정된다. * 2. [[히미코]]설 히미코(비미호)가 모델이라는 설. [[에도시대]]부터 등장한 설이다. 히미코가 진구 황후와 마찬가지로 신술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무녀 여왕이었다는 점 등 그나마 가장 타국 역사서의 기록과 근접하기에 나온 설. 그러나 재위 기간에 약간 차이가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토요]]도 진구 황후로 융합된 것 본다. [[임용한]]의 '한국고대전쟁사' 1권에서는 히미코 설을 채택하면서도 진구 황후의 신라 침공은 백제에 고용된 용병으로써의 공격이고, 신라왕을 죽였다는 것은 위에 나온 신라의 왕족이자 장군인 [[석우로]]를 죽인 것을 과장한 것이라는 절충설을 택했다. 세키 유지는 진무=스진=오진이 전부 동일인물이며, 아마테라스=진구 황후=히미코로 초대 천황의 어머니라는 설을 내놓아 시대 오차를 수정할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일본서기에서 삼한 정벌 전에 있던 규슈 정벌과 그곳에 있던 여추장 멸망, 삼한 정벌 이후 저주로 야마토 입성 일화를 진무=스진=오진의 기록과 합쳐 삼한 정벌을 제외한 사건 전후와 세 천황 일화를 하나로 합친 게 진실이라고 여겼다. * 3. [[고교쿠 덴노|사이메이 덴노]]설 과거 백제 멸망시 백제 부흥군을 파병한 [[고교쿠 덴노|사이메이 덴노]]가 모델이라는 설. 일단 둘 다 여왕이고, 시호가 타라시 계통인 것도 증명이 가능해지며, (과거 [[야마토]]의 위치가 아직 논란 중인데 반해) 진구 황후 전설과 관련있는 신사들이 많은 규슈에 실제로 부흥군 출병과 관련해 사이메이 덴노가 머문 적이 있어 이를 근거로 주장하는 설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설 중 하나이다. * 4. [[근초고왕]]설 근초고왕 재위 시절 업적들의 주체가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의 업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진구 황후가 근초고왕을 모델로 한 가상인물이라는 설. * 5. 가공인물설 일부 학자들은 진구 황후가 신라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추정을 한다. [[백촌강 전투]]의 패배 이후 일본은 쓰시마와 규슈에 신라와 당의 침공에 대비한 다수의 성을 축조했는데 이후로 신라를 가상 적국으로 규정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포와 증오라는 양가 감정이 생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나타난게 바로 진구 황후라는 것. 일본이 역사적으로 신라와 충돌이 잦았던 적대 관계라는 점, 진구 황후가 [[삼한정벌]]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인 적은 신라라는 점, 파사 이사금의 항복을 받은 점, 진구 황후 전설에 기반한 신사들이 규슈에 다수 존재한다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즉, 내부적으로 우리는 신라를 정복했었고 신라는 우리의 속국이니 두려울 것 없다는 차원에서 만들어낸 신화가 관찬 사서인 일본서기에 기록되면서 실제 역사로 둔갑했다는 것. * 2, 3, 4 종합설 일본서기가 기록된 시기는 8세기로, 3세기에는 나라가 세워지기도 전이라 명확한 기록 문화가 있었을 리 없고 6세기에 나라가 세워진 뒤 여러 기록물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사라져서 일본서기나 고사기 같은 기록물들이 나타난 건 8세기다. 즉 8세기에 이르기까지 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온갖 전설과 구전이 뒤섞여서 이어졌을 텐데, 일본서기에 기록될 시점에 이미 여러가지 역사와 전설이 하나로 합쳐져서 진구 황후의 존재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 6. 한국계 [[도래인]]설 미국의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견해로, [[오진 덴노]]와 함께 [[고대 한국어]]족의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신라계 [[도래인]] [[천일창]]'''의 후예라고 나온다. 자세한 것은 [[https://homaranisto.tistory.com/38?category=772561|이곳]] 참조. 보빈에 따르면, 역사비교언어학적으로 진구 황후와 오진 덴노는 고대 한국어(한어파인 [[신라어]] 계열로 추정)를 쓰던 한국어족 사용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말은 곧 [[한국어족]] 사용자들이 한반도 전체를 한국어족 권역으로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서 [[윌리엄 1세|일본 열도로까지 진출]]해 [[일본 황실]]까지 교체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어째서 삼한정벌이나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이야기가 등장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황실이 도래인이라면 혈연적 정통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프로파간다를 위한 정치적 윤색과 과장이 필요하다. 한국계 도래인처럼 아예 바다 건너 온 세력이면 가장 좋은 정치적 윤색 방법은 스스로가 나고 자라 온 일대(한국계 활동 지역인 한반도)를 자신의 지배 세력(야마토) 휘하의 피지배 세력으로 둠으로써 그 이질적인 세력(한국어계) 역시 내집단(야마토)의 한 부류임을 내세워 자신의 정통성을 키우는 것이다.[* 이것을 정확히 반대 입장으로 적용한 게 바로 [[내선일체]]론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삼국시대를 즈음해서 한반도 남부에 토착민이자 피지배 부족 집단으로나마 왜계 부족, 즉 야요이의 사촌인 [[일본어족]] 사용자들이 있었다고 하니, 야마토와 연계할 법한 좋은 구실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일본 황실의 정치적 입장에서는 어쨌든 자신의 본 정체성인 한국계와 반도 왜계 부족들, 그리고 일본 열도의 야마토인을 모두 같은 정치적 집단으로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상이한 집단들[* 한반도의 왜계 부족들은 야마토인들과 조상을 공유할 뿐, 정체성은 전혀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부여계 한국어족 집단과 함께 서로 상이한 집단들에 속했다.]을 모조리 자기네(야마토) 휘하로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설]]은 진구 황후 등 [[한국계 일본인|야마토로 귀화한]] 한국계 정치 세력이 자신들의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재정립하기 위한 이유로 내세운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기기신화에서 말하는 [[주아이 덴노]]에서 진구 황후로의 정권교체는 일본 열도 석권을 우선시한 기존 왕조(주아이계)가 한반도와의 관계를 우선시한 세력(진구계)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과정을 담은 왕위 찬탈 신화일 수 있다. 여기에 보빈의 학설을 덧붙이면, 진구 황후와 오진 덴노는 친백제 혹은 백제계 도래인 세력을 상징하는 인물들로서, 이들은 백제-가야-왜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물론, 하나의 가설이자 추정일 뿐이기는 하지만, 진구 황후의 생존 시기로 언급되는 3세기 경에 [[고훈인]]이라 하여 [[한국인|현대 한국인]]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족 집단이 대거 유입된 바 있으므로,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가설로 여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